디지털 전환이 여는 국민 정신건강 예방의 길
[내일신문 기고]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약 23.2명에 이른다. 이는 OECD 평균인 약 10.7명의 두배를 넘는 세계적으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이다. 청소년 청년 노인 할 것 없이 전 세대에서 정신건강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의 정책은 여전히 ‘문제가 생긴 뒤 치료’에 머물러 있다. 병원을 찾아가 약을 처방받고 필요한 환자에게 상담을 제공하는 방식은 필수적이고 필요한 방식이다.
하지만 이미 증상이 발생하고 악화된 뒤에 개입하는 구조로는 증가하는 자살률을 막을 수 없다. 정신건강 문제는 조기 발견과 예방적 개입이 가장 중요하다. 시기를 놓치면 치료 기간이 길어지고 재발 가능성도 높아지며 사회 전체가 치러야 할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이제 우리는 ‘치료 중심’에서 ‘예방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예방이 효과를 증명한 국내 사례들
예방 정책이 국민의 생명을 지키고 국가 의료비를 절감한 사례로 우리 사회와 의료분야는 이미 의미있는 경험을 가지고 있다.
위암과 유방암 검진 사례를 보자. 우리나라는 위암 발생률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이다. 특히 한국 남성에서 흔하며, 전체 암 발생 원인 1~2위를 차지한다. 그러나 사망률은 발생률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
이는 위암이 덜 치명적이어서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조기검진 제도 덕분이다. 실제로 위암 검진 참여율은 2010년 44.7%에서 2019년 62.9%까지 올랐다. 조기 위암 발견 비율도 1995년 28.6%에서 2019년 63.6%로 크게 늘었다. 검진을 받은 사람은 위암 사망 위험이 평균 21% 줄었고 내시경 검진의 경우 최대 47%까지 감소했다.
즉 한국은 위암이 OECD 평균보다 훨씬 더 자주 발생하지만 조기 검진 정책 덕분에 위암이 많이 생기더라도 사망률은 감소하는 구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유방암 검진의 2002년 도입 당시 참여율은 10% 미만에 불과했다. 하지만 제도 정착 이후 2017년 62%, 최근에는 64%까지 확대됐다. 그 결과 유방암 환자의 5년 생존율은 2000년대 초반 약 79%에서 최근 94%에 달하며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OECD 통계 기준으로도 한국의 유방암 5년 생존율은 86.6%로, OECD 평균(84.5%)을 웃도는 수준이다. 다시 말해 정기검진이 보편화되면서 유방암도 조기 진단·치료가 가능해졌고, 국제적으로도 생존율에서 앞서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이처럼 예방 중심의 국가 정책은 수많은 생명을 살리고 의료비를 절감하며 사회적 비용을 줄였다. 정신건강 분야 역시 같은 접근이 절실하다.
디지털이 여는 새로운 예방의 길
그렇다면 정신건강 예방은 어떻게 가능할까? 단순한 자기보고식 설문지만으로는 정확한 위험 신호를 잡아내는 데 한계가 있다. 실제로 많은 연구에서 설문지는 참여동기와 솔직성 등 주관적 변인에 크게 좌우되어, 조기 발견의 정확도가 떨어진다. 반면 심박수와 뇌파와 같은 생체신호는 개인의 정신건강 상태를 보다 객관적이고 정확히 반영한다.
최근 임상 연구에서는 생체신호 기반 정신건강 평가는 기존 설문지 대비 3~4배 높은 민감도를 보이며, 우울·불안·스트레스와 같은 위험군을 조기에 찾아낼 수 있음이 입증됐다.
이처럼 단순히 “생각과 느낌”을 묻는 시대를 넘어, 생체신호를 토대로 한 디지털 정신건강 조기경보 시스템을 일상 속에서 구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를 통해 치료 중심에서 예방 중심으로, 병원 중심에서 생활 중심으로, 개인의 문제에서 사회 공동체의 책임으로 패러다임 전환이 가능해진다. 정신건강 예방은 국가 경쟁력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2003년 이후 자살률이 전세계 1위를 굳건히 지켜오고 있는 나라에서는 정신건강 디지털 예방 사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정신건강 악화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울과 불안으로 인한 노동 손실, 자살로 인한 사회적 손실은 이미 수십조원 규모에 달한다. 따라서 정신건강 예방은 복지 차원을 넘어 국가 경쟁력의 문제다.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학교와 직장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결국 우리 사회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고 안전망을 강화하는 일이 된다.
이제 정신건강은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도로와 철도를 깔고 통신망을 구축하듯, 국민 정신건강 예방 시스템을 국가 인프라로 투자해야 한다.
국가·국민 모두 전환이 필요
이제 국가의 정책 담당자와 공무원을 비롯해 국민 모두가 인식을 바꿔야 한다. 정신건강 정책의 예산이 여전히 치료 위주라면, 예방과 조기 개입을 위한 투자와 제도 정비를 서둘러야 한다. 설문에 의존한 기존 방식은 한계가 분명하며, 심박·뇌파 등 생체신호 기반 평가는 설문 대비 3-4배 높은 민감도로 위험군을 조기에 포착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국내외 연구 근거가 축적되고 있는 만큼, 이를 제도와 예산으로 뒷받침해야 현장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국민도 생활 속에서 참여해야 한다. 매년 건강검진을 받듯 정신건강 검사도 정기적으로 받는 문화를 만들면 조기 검진과 예방 관리가 생활화되어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고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정신건강 위기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암 조기검진 사업에서 예방의 힘을 경험했다. 이제 그 교훈을 정신건강에 적용할 차례다. ‘치료에서 예방으로’ 전환이야말로 한국 사회가 ‘높은 자살률 지속’ 위기를 넘어 안전하고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출처: 내일신문